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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해냄,2008)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는 '애국조회' 시간이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고, 교내외의 무슨무슨 대회에서 상을 탄 아이들에게 시상식을 하고, 교장선생님의 훈화로 이어지는 조회는 대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지루해서 견딜 수 없을 때면 시선을 단상에 고정시킨 채 한 가지 상상을 즐겨 하곤 했다. 그 상상의 제목은 '만약 여기서 나 혼자 ***한다면'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나 혼자 쓰러진다면, 만약 여기서 나 혼자 투명인간이 된다면, 만약 여기서 나 혼자 스머프처럼 작아진다면, 거인처럼 커진다면...그런 상상 가운데 가장 짜릿하고 즐거워서 가장 많이 택했던 옵션은 '만약 여기서 나 혼자 공중으로 서서히 올라간다면' 이었다. 쓰러지는 건 어린 마음에도 너무 비극적이고, 투명인간이 되면 내가 투명인간이 됐는지 아무도 모를테니 재미가 없고, 거인이 된다면 아이들이 혼비백산할테고, 작아진다면 조회가 끝나고 밟혀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서서히 공중으로 뜨는 상상은 그런 걱정이 필요 없었다. 물론 다시 현실세계로, 아이들의 키 높이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혼자 뜰 수 있다면 혼자 내려올 수도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진짜로 공중에 뜨지는 못할 테니까.

 

이런저런 선택지 가운데 '공중부양'을 택한 것은, 그것이 가장 화려한 부러움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허영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짝꿍 여자아이부터 모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보겠지. 어떤 아이들은 '조회시간에 공중에 떠오른 아이가 있다'고 집에 돌아가서 침을 튀기며 얘기할테고, 나는 이내 유명해지겠지. 아예 슈퍼맨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힘이 엄청나게 세지면, 그만큼 할 일이 많아질테니, 그냥 뜨기만 하면 딱 좋겠다...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지루한 조회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그 시절에, 나는 '나만 공중에 뜬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중에 뜨는 것은 조회라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기분좋은 놀이일 뿐, 공중에 뜬다는 사실이 나를 다른 방식으로 구속할 것이라는 이성적인 상상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 철학적인 소설의 표제는, '오직 나 혼자'라는 가정이 현실에서는 어떤 것인지를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소설은 '본다look'라는 행위에 기초한 우리의 사회, 관습, 예절, 인간성, 그리고 그 총체인 '문명'이라는 것이 그 기초를 잃었을 때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지는지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선천적인 시각장애 때문에 출발점부터 시각을 제거당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각을 거세당한 인류에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느 교차로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던 한 운전자가 시력을 잃으면서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질병 앞에 문명의 껍질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오직 동물적인 생존 본능만이 아귀같이 남는다.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아직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아직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로부터 격리당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궁극적인 착취와 폭력이다. 시각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 내면의 인간성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리고, 강간하고, 죽인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몇몇 선한 이들의 소망은 그야말로 한낮 백일몽일 뿐이다. 선한 의지는 끝내 무시당하고, 조롱받는다. 인간은 결국 이렇게 잔인한 것인가. 아니, 작가는 잔인함은 그냥 거기 있는 실체일 뿐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존엄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존엄이 있는 존재의 잔인과, 존엄마저 잃은 존재의 잔인은 기실 간과 짐승의 거리 만큼 떨어져 있다.

 

 누구든 항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자를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소. 왜요. 원을 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그 말이야 맞지만, 수치심이 우리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그 말은 맞소,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p.275)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역시 희망을 그리고 있다. 전 인류를 통틀어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와, 그녀 주변의 작은 커뮤니티는 시행착오를 통해 보이지 않는 삶과, 보이지 않는 자들을 도와주는 삶에 익숙해진다. 어릴 때 자주 하던 '장님 세상에서는 애꾸가 왕이다'라는 농담이 현실이 된 듯, 의사의 아내는 마음만 먹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작은 커뮤니티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그 노력을 희생할 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다시 시력을 되찾았을 때 직감적으로 '이제 내 차례다'라며 자신만이 눈이 멀 것을 예상하고 받아들이며,  홀로 목격해 온 눈먼 자들의 죄악을 한 몸에 품고, 어두운 심연으로 홀로 가라앉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자를 연상시킨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이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p.461) 

 

이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 글에서 인용된 부분만으로도  책장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가 느낀 당혹감의 일말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발화(發話)의 주체를 알기 쉽게 따옴표로 엮어서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가 시작될 때 따로 줄을 내려주지도 않는다. 처음 읽다 보면, 이게 누가 한 얘긴지, 누구에게 한 얘긴지, 실제 발화인지 등장인물의 상상인지 좀처럼 알아내기가 어렵다.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모습을 쉽사리 그릴 수가 없다는 점에서, 작가는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일종의 시각 상실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 상황이라면 목소리로라도 화자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지워진 blindness의 굴레는 소설 속의 인물들보다 더 가혹하지만, 어차피 읽는다는 행위가 눈으로 활자를 쫓는다는 점에서는 양측이 처한 상황에 큰 차이가 없다. 마치 임사(臨死)체험처럼, 독특한 문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임맹(臨盲)체험을 제공하는 작가의 배려(!)가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불편함에서 감탄으로 바뀌어 간다. 대가(大家)라는 건 이런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by venia | 2009/04/27 09:21 | 진찰실 | 트랙백 | 덧글(0)

스윙에 대해

 나는 최근에 골프를 시작했다.
 

골프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미숙하나마 야구를 했었다. 골프도, 야구도, 어느 쪽도 어느 누구보다 잘 하지 못했고(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망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양쪽 어느 쪽으로도 그걸 해서 돈을 벌어먹고 살 생각은 아직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렇게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맥주를 석 병 혼자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다. 더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옷을 갈아 입으면서도, 그 생각들의 단초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핵심이 되는 단어를 중얼거렸는데, 그건 바로 '스윙'이다.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골프장, 그러니까 '필드'에 나간 것은 바로 지난 주 토요일이다. 다시 말해 4월 18일이다. 2001년에 학교 교양체육의 일환으로 잠시 골프 클럽을 잡았던 걸 제외하면 그야말로 8년만이다. 2001년에도 수업에서의 학점을 따기 위한 골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 골프에 있어서 나는 아직 그야말로 생초보일 뿐이다. 2001년의 필드는-지금도 기억나지만-겨울철에는 스키장으로 사용되는 언덕 투성이의 골프 코스였고,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이란 단 하나, 술을 진탕 먹은 다음날 아침 억지로 끌려나간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생각지도 못한 부드러운 스윙으로 내 딴에는 엄청난 드라이버샷을 날렸다는 것 뿐이다.

 

다시 지난 주 토요일로 돌아간다. 나는 취재로 알게 된 군 사람들과 군이 운영하는 골프장에서 클럽을 잡았다. 언감생심, 드라이버는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새로 구한 오래된 골프클럽-회사의 지인으로부터 공짜로 인수받았다-에는 드라이버는 커녕 우드와 퍼터도 없었으니 말 다했다. 그래서 첫 홀부터 내가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들어간 클럽은 누구나 골프를 시작할 때 처음 잡는다는 7번 아이언이었다. 첫 스윙. 가능한 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멋진 샷-적어도 내 기준에는-을 날리려고 휘둘렀지만 보기좋게 공을 빗나갔다. 두번째 샷은 공에 맞긴 했지만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오른쪽으로 휘어져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초보의 샷,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서 스윙 얘기. 이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스윙이라 함은 두 손으로 함께 길쭉한 막대모양의 물체를 잡고 양 팔로 휘둘러 작은 구체를 맞추는 것으로 하자. 그 점에서 골프와 야구의 스윙은 같다. 올바른 궤적의 스윙을 위해 하체의 움직임은 제한되고, 어깨 이상 머리의 움직임은 제한되는 정도를 넘어서 금지당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아주 간단히 말해 그뿐이다. 골프의 스윙은 바닥에 정지된 지름 4cm 정도의 딱딱한 구체를 때리는 것이고, 야구의 스윙은 속도를 몸에 안은 채로 내 옆을 스치는 지름 8cm정도의 빠른 구체를 때리는 것이다.

 

골프 스윙과 야구 스윙은 기본적으로 같다, 고 2001년에 나에게 골프를 가르쳤던 스승은 얘기했다. 같은 점은-오른손 잡이의 기준으로-왼팔이 방향을 잡고 오른팔이 힘을 싣는다는 것과 가장 효율적인 타격을 위해 왼팔과 오른팔이 겪는 궤적의 움직임이 일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궤적에 있어서는 골프와 야구가 다르다. 이는 목표가 되는 공의 상태가 정지중(골프)과 운동중(야구)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야구는 공이 움직이고, 변화구냐 직구냐에 따라 공 자체의 궤적도 변하기 때문에 양팔이, 정확하게 얘기하면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겨냥을 하는 왼팔의 움직임이 골프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동적이다. 몸쪽 공이냐 바깥쪽 공이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느냐, 아래에서 위로 치솟느냐,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파고드느냐, 아니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달려나가느냐에 따라 왼팔이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오른팔은 임팩트의 순간 배트의 움직임을 고정해 배트의 경도와 탄력을 볼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골프는 볼이 정지해 있다. 따라서 야구에 비해 공을 때리기가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이게 쉽지 않다. 야구에서는 곧잘 통하는 임기응변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볼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 때문에 스윙의 임기응변보다는 스윙의 한결같음, 즉 자기의 신장과 팔의 길이에 따른 운동 범위와, 골프 클럽의 길이가 항상 몸에 익은 듯 일정해야 공을 때려낼 수 있다. 골프의 폼이 늘 어정쩡하고 어색하며, 평소에는 쓰지 않는 허리 뒷쪽, 그러니까 등과 엉덩이 사이의-백팩을 메면 백팩의 바닥 가죽이 닿는-근육을 무리하게 써야 하는 이유는 바로 어떤 스윙을 하든 정해진 위치에서 공을 때려내야 하는 '한결같음'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풀 스윙부터 퍼팅까지의 궤적이 그리는 '호'의 길이 차이는 있을 지언정 스윙은 늘 같아야 하며, 대부분의 스윙에서 볼은 그 스윙이 지나는 가장 낮은 궤적 위에 정확하게 위치해야 한다. 있는 공을 때린다기 보다는 스윙을 하다 보면 가장 저점에서 공이 저절로 맞는다는 느낌이다.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겨냥하는 왼팔은 늘 곧게 뻗어야 하며, 오른팔은 늘 왼팔의 종속변수로 움직여야 한다. 오른팔은 차라리, 임팩트 순간에 공에 의도된 힘을 주는 '오른손 그립' 을 위해 부드럽게 움직이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다시, 나는 최근에 골프를 시작했다.

 

7번 아이언으로 하는 티샷은, 물론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함께 필드에 선 사람들은 고맙게도 이제 시작하는 나에게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참고 기다려준 덕분에 18홀의 후반을 시작할 때는, 그럭저럭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날릴 수 있었다. 물론 힘을 제대로 싣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기에 샷은 늘 생각보다 높이 떠서 얼마 날아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헛스윙을 하거나, 공의 윗부분을 깎아서 땅볼이 되는 경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라운딩의 후반부에, 나는 남들 모르게 그립을 바꾸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배웠던 그립-그러니까, 오른손 약지와 왼손 검지가 교차되는-에서 야구 배트를 잡듯 교차되는 손가락이 없는 그립으로 바꿨다는 얘기다. 골프에서는 실제로 이런 그립이 있다고 한다.(이름도 '베이스볼 그립'이다.) 몸에 익지 않은 클럽으로, 몸에 익지 않은 자세를 거쳐 공을 처야 하는 순간에 그립마저 몸에 익지 않아 고생했는데, 베이스볼 그립으로 바꾼 뒤에는 훨씬 편하게 스윙을 할 수 있었다. 오래전 골프 스승의 말이, 즉 골프와 야구 스윙의 공통점을 설파한 그 말이 우연히 생각났기 때문이다. 스승은 이렇게 얘기했었다.

 

 야구 스윙을 그대로 아래로 향한다고 생각해라. 클럽의 끝이 땅을 살짝 스치려면, 왼팔이 땅과의 거리를 정확히 잰 상태로 고정돼야 한다는 사실을 느껴라. 왼팔이 고정되려면 팔을 죽 편 상태가 돼야 한다. 팔을 죽 펴려면 상체는 허리를 중심으로 한껏 뒤틀려지며, 하체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비일상적으로 뒤틀린 상체와 하체를 다시 한 몸으로 합치는 과정에서 클럽헤드에 속도가 붙고, 그 속도를 그대로 볼에 전달하는 순간에 그립의 힘이 필요하다. 머리는 콤파스의 바늘이 종이에 콕 찍은 점이어야 한다.

 

 

 

 

또 언제 필드에 나갈까. 생각보다 흥분되고, 떨리고, 기다려지지 않아 오히려 이상하지만, 머리 한 구석에서 골프에 관한 생각을 늘 굴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된다. 이렇게 생각만 하고 스쳐지나느니, 차라리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골프는 분명히 무서운 매력을 가진 운동임에는 틀림없다. 그나저나 '해야 한다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가끔이더라도 휴일에 훌쩍 나갈 걸 생각하니 서운하다'는 강작가에게는 꽤 송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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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a | 2009/04/24 14:04 | 진찰실 | 트랙백 | 덧글(1)

볼드와를 찾습니다

  • 80년대 소년잡지의 구성 가운데 주목할 것은,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버거운 내용이 꽤 많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이 오히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측면도 있다. 소련이 중부 시베리아의 오지에서 가스광을 파다가 지옥의 문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공동을 발견했다든가, 이탈리아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리며 세계멸망을 예언했다든가, 3,4백년째 사람들에게 목격되고 있는 '생 제르망 백작'이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한 자선파티에 참석했다든가 하는 기사는 그 진위야 어찌됐든 자기와 가족, 친구들의 작은 범위 안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세계는 이렇게 넓고 커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 그런 기사들의 상당수는 당시 소년잡지를 만들던 기자들이 취재한 것이 아니었다. 매달 한두 페이지에 걸쳐 전세계의 음모론과 환상과학을 다루던 그 기사들은 대개 일본의 소년잡지에서 기사며 사진을 그대로 베껴 쓴 이른바 '무단전재' 기사였다. 음모론을 취재할 능력도 의지도 없던 한국의 소년잡지 편집자들은 두툼한 일본 잡지를 보고 입맛에 맞는 기사를 뽑아 쓰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1년이나 2년 정도의 주기로 같은 기사도 반복됐을 것이고, 흥미롭거나 충격적인 기사들은 재탕에 삼탕까지 거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대충 기억나는 '자주 본 기사'들은 대개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었다. 네스호의 괴물, 버뮤다 삼각지대, 설인 '예티', 반인반수 유인원 '사스카치'와 캐나다 삼림 속의 '빅풋', 그리고 그 유명한 '로스웰 우주인 해부사건'...

     

  • 나는 사실, 매달 사 보던 소년중앙에서 그런 기사를 찾아보는 걸 즐겨 했었다. 프로야구 선수 이만수 아저씨와 김봉연 아저씨의 홈런왕 라이벌 대담도, MBC 드라마 '간난이'에 남매로 출연해 인기를 모았던 아역 배우 김수양, 김수용 인터뷰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 길창덕의 '꺼벙이', 신문수의 '로봇 찌빠'같은 만화는 재미있었지만 스토리의 틀에 갇혀 답답했고, 과학기사는 이미 백과사전에서 본 것들이었다. 그래서 갓 구입한 소년중앙을 사서 손에 들면 페이지를 훌훌 넘겨 파랗거나 빨간 색 삽화와 사진으로 가득한, 단 두 세 페이지를 처음으로 찾았다. 이번 호에는 어떤 끔찍하고 놀라운 기사들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 그 기사 가운데 아직도 생생한 것이 바로 '볼드와'에 관한 기사다. 기억은 선명하지만 위에 열거한 다른 기사들보다 양이 많거나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외계인 특집으로 꾸며진 기사 가운데 사진 한 장과 설명 한 줄, 이게 전부였다. 사진에는 정장을 입은 한 남자의 상반신이 찍혀 있었다. 기자회견 중에 찍은 듯 주변에는 카메라기자의 손이나 카메라 일부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터미네이터 2에 T-1000으로 나온 로버트 패트릭의 이미지와 흡사한 사진속의 남자는 아주 말끔하고 날카롭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의 약간 윗쪽을 굳은 표정으로 째려보고 있다. 사진의 캡션은 이렇게 돼 있다. '스스로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볼드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 사실 볼드와를 다룬 소년중앙의 기사는 당시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간, 머리속 한참 구석에 밀려나 있던 기억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갑자기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뒤에 무슨 계시처럼 떠오른 뒤에는, 오히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은 빛을 잃고 사라져 갔고 그 자리를 야금야금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 기사가 왜 지금도 기억날까. 트럼프보다도 작은 사진과 한 줄의 설명. 특집 기사 내용은 다 잊었는데, 유독 그 기사만 사진처럼 뇌리에 박혀 있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말 외계인이든, 아니면 -기사의 뉘앙스대로-사기꾼이든 상관없이 나는 볼드와가 누군지 궁금했다.' 볼드와라는 이름을 가진 사진 속의 남자가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무엇이고, 그 주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기자들의 취재를 받을 정도로까지 알려졌으며,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가 궁금했고, 그 내용이 지역 타블로이드 신문을 넘어 (둥실둥실 날아가) 어쩌다가 일본 소년잡지의 한 구석을 장식했으며 그 기사를 본 소년중앙 편집자나 기자가 어떤 경위로 그 기사를 소년중앙에까지 내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사진이 찍히던 순간 이후에 볼드와는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죽었다면 죽을 때는 어떤 상태였는지가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가 외계인이라는 주장을 펴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도 알았으면 좋겠다.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기까지 하다.

 

  •  볼드와를 역추적하기 위해서는 '볼드와'라는 이름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일단 내 기억에 있는 '볼드와'라는 단어가 소년중앙에 실려 있는 그대로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그 첫 단계가 될 터인데,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이마저도 확인이 쉽지 않다. 내가 소년중앙을 본 건 대략 1982년부터 1987년 사이 6년 동안이다. 거의 매 달 빠지지 않고 봤으니 권수로는 72권인데, 72권 가운데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권. 물론 내가 찾는 그 기사는 없었다. 네이버의 '클로버문고의 추억'이라는 카페에 가면 당시 소년잡지들에 대한 정보가 가끔 나온다. 디지털 복간 얘기까지 구체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이 카페에서 쓸만한 정보를 얻게 될 가능성이 높긴 한데, 카페가 소년잡지 중심이라기보다는 클로버문고 등 단행본 중심이어서 무작정 기대하기는 어렵다. 헌 책방이나 헌 책을 다루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최근 7,80년대 소년잡지에 대한 수요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관심이 생기면 유통이 있을테니 잘만 하면 80년대 소년중앙을 다 갖고 있는 수집가나 도서관이 갑자기 툭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 일단 '볼드와'를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다른 루트의 추적도 계속해야 한다. 소년중앙 기사의 원문, 즉 소년중앙이 무단전재한 일본 기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볼드와'를 일본어로 옮기면 'ボルドワ(보루도와)' 혹은 ,'ボ-ルドワ(보-루도와)' 둘 가운데 하나다. 오타쿠 많은 일본이니까 관련된 사이트나 포스팅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야후 재팬에서 검색한 결과는 실망적이다. 검색에 걸리지 않는 개인연구자의 웹 페이지나 블로그를 찾아 나가는, 방대한 작업에 덥석 손을 대기가 현재로서는 두렵다. 일본 소년잡지 기사에 대한 연구나 분석도 있을 수 있으니 계속 구글링을 해야 할 것 같다.

 

  • '볼드와'<-ボルドワ, 혹은 ボ-ルドワ <- (       )의 추리 과정을 거친다면 (   ) 에는 어떤 알파벳이 들어갈까. 추리 가능한 조합은 일단 Boldwa, 혹은 Baldwa. 그러나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발음으로 봤을 때 헝가리나 체코, 유고 쪽의 성씨일 가능성이 높고, 표기도 영어 알파벳의 Boldwa가 아닐 수 있다. 볼드와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동유럽 이민자의 자손일 것이다. 헝가리에는 Boldva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경우 발음은 '볼드와'가 아니라 '볼드봐'에 가깝다. 헝가리어는 w, x, y를 표기에 사용하지 않고, W의 경우 발음은 프랑스어의 v에 가깝다. 갈 수록 미로에 빠져드는 느낌.

 

  • '볼드와'를 찾는 일을 계속하면 할 수록 하루키의 초기 소설 가운데 [1973년의 핀볼]이 오버랩된다. 주인공은 어느날 핀볼 머신인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쉽'을 찾기 시작한다. 매니악한 핀볼 연구자들을 만나 닭똥 냄새 가득한 창고에 어느 수집가가 보관하고 있던 수 많은 핀볼 머신 가운데 플리퍼가 세 개인 스페이스쉽을 만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다만 소설에서 핀볼 머신은 그 자체가 주인공의 추억이며, 기억인 동시에 혼란한 시절을 함께 한 주인공 '자아'와도 동일시된다. 바로 이 점이 나와 볼드와 사이에는 결락된 부분이며, 내가 갈 수 있는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를 미리 예측해 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 이러다가 어느 날 어딘가의 낡은 서점에서 펼쳐든 소년중앙에서, 볼드와의 사진을 발견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될까. 그 시간을 맞는다는 생각이 백 퍼센트 기대만은 아닌 것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나 외에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확인할 수도 없는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애써 혼자 만족할 수 있는 가치를 찾는 작업은, 그래서 더욱 외롭고 고되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by venia | 2009/04/09 12:57 | 수술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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